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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영화리뷰

영화 미스 스티븐스 리뷰 : 내가 당신의 마음을 알아줄게요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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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산골영화제에서 만난 보석 같은 영화

저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우울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데, 모든 것이 푸르르게 자라나고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그 자리에 그대로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혹은 모든 것들의 성장이 너무 예뻐서 슬픈 것 같다는 어찌 보면 오글거리다고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이 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매년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많은데 이루지 못한 것이 많고,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것이 더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5월이나 6월쯤에는 한 번씩, 예정에 없던 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예전에는 그 도피처가 주로 일본이었고, 더이상 갈 수 없게 된 이후에는 대만이었고, 그러고도 더 숨을 곳이 필요할 때면 가까운 어디로든 떠나 사람이 많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숨을 돌리고 오곤 했습니다.

 

2019년 6월에도 아직 풀리지 않은 마음이 남아 어디론가 떠나고픈 마음을 안고 있던 중, 마침 '무주산골영화제'와 타이밍이 맞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가고 싶었지만 막상 시간이 안 맞고, 할 일이 있고, 혼자 가기에는 조금 두렵다는 이유로 피해왔던 곳이었습니다.

 

무주에서 녹음 푸르른 6월초쯤 매년 치러지는 이 '산골영화제'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산으로 둘러싸인 무주에서 펼쳐집니다. 주 무대인 무주 문화예술회관과 운동장이 있는 곳을 비롯하여, 야간 야외 상영이 펼쳐지는 곳까지 자연과 줄곧 함께 합니다. 그래서 초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무주의 쌀쌀한 공기와 함께 색다른 분위기를 맞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운전이 서툴러 야간 상영은 보지 못하고 왔지만, 돗자리와 맥주를 가지고 가서 맥주 한 잔 하며 새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산을 배경으로 영화를 보는 맛은 일품이라고 이전에 이 영화제를 추천해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영화뿐 아니라 오픈 스테이지에서 펼쳐지는 배우, 감독과의 인터뷰와 독립 책방도 좋고, 더워지기 시작하는 여름 공기와 바람을 맞으며 맥주 한 잔을 하는 것도 남다른 매력을 안겨줍니다. 올해도 6월 첫째 주에 개막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은 둘러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특히, 양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중경삼림' 리마스터링 본이 상영되기도 한다고 하니 저 역시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만, 그래서, 2019년 6월 무주 산골영화제에서 보게 된 영화가 바로 이 '미스 스티븐스'였습니다. 줄리아 하트의 2016년 작품으로 티모시 샬라메와 릴리 레이브, 릴리 라인하트 등이 출연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티모시 샬라메가 '콜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유명해진 이후 개봉되었습니다.

 

이때 흐르는 '시스터 골든 헤어'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 참 멤돌았다

미스 스티븐스

레이철 스티븐스는 29살의 영어 선생님입니다.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지치고 지루한 매일이 힘에 부친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와 주말 동안 열리는 연극대회에 참가하게 된 세 명의 학생이 있습니다. 연기는 특출 나게 잘 하지만 무엇인가 이상한 빌리, 깍쟁이 완벽주의자인 마고, 그리고 귀엽고 끼 많은 샘. 이렇게 네 명은 스티븐스 선생님의 낡은 차로 대회장을 향해 출발합니다.

 

서로를 매일 보기는 했지만 잘 모르는 게 더 많았던 만큼 가는 차 안은 어색함만이 가득합니다. 그러던 중 차에 펑크가 나게 되어 한참을 길거리에 서 있은 후에야 그들은 대회장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환영회에서 스티븐스는 다른 학교 교사인 월터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하룻밤을 나눈 후 돌아오는 길에 빌리와 마주칩니다.

 

다음날 차를 고치러 가는 레이철에게 굳이 함께 가겠다고 하여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오가는 대화 속에서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면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마고이지만 첫 라운드에서 실수를 하고 맙니다.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던 그녀는 이 여행이 학교에서 지원한 것이 아닌 자신의 부모가 지원한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꿈에 대해서도 말이죠. 그렇게 대회의 밤이 깊어갈수록 네 사람은 서로에게 더 가까워져 갑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 또한 보이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긴장과 불안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과연 이 네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모습들을 보여주게 될까요.

내가 당신의 마음을 알아줄게요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물론 레이철과 빌리입니다.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도 소중하고 잘 어우러지지만, 이 둘이 교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서 감정이 폭풍 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빌리는 행동장애로 약물을 처방받아 복용 중이라 모두가 그를 폭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대합니다. 어쩌면 빌리는 남들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 모두들 그렇게 그를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고 넘긴 레이철의 마음을, 슬픔을 먼저 읽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리는 말합니다.

 

'당신에게도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요.'
Someone should take care of you too.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 혼자 두 발로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온전히 나 혼자 세상을 살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마음 기댈 곳 하나 없어 보인 채, 매일 많은 아이들과 마주하는 레이철은 한 없이 지쳐 보이기만 합니다. 어쩌면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빌리는 그녀가 지쳐있고 슬프다는 것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한껏 긴장해 굳어있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몇 살이 된다 해도 우리에게는 나의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내 마음을 읽어주는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들과 많이 만나는 서비스직에 있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주려다 내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그것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때는 더욱더 지치고, 슬프고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월터처럼 자신만의 선을 긋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선을 가진다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하는 생각에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나에게 누구 한 명만 있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고는 합니다. 그래서 만약 지금, 지치고 힘들어 내 마음을 다독여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이 영화가 딱일 것 같습니다.

 

너무 부담스럽지도,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대충 하는 것도 아닌 내게 지금 딱 필요한 정도의 거리와 위로를 주는 영화, 미스 스티븐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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